기호와 이미지-해석의 즐거움
1. 흔히 미술을 소통의 한 수단이라고 일컫는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 지식을 언어나
표정, 몸짓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듯이 미술도 그러한 역할을 하는 수단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감정, 의지, 지식과 같은 정보는 각자의
내적인 정신활동이므로 타인에게 직접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보는 그 정보를 대신할 기호(언어, 표정, 몸짓 등)로 전환되어야 비로소
타인에게 전달이 가능해진다. 정보 전달에는 기호라는 매체가 필요한 것이다. 미술작품도 소통수단이므로 역시 정보를 담은 기호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그 기호는 대부분 영상(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결국 미술작품은 작가가 이미지라는 기호로 부호화한 어떤 정보이며 우리는 이미지를 매체로
하여 작품 속의 정보를 해독하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기호는 일정한 규칙과 체계를 가져야한다. 어떤 한 기호는 항상 특정한 정보를 대신하는
것으로 약속이 되어 있어야 그 기호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에 소통이 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말(한글)로부터 이모티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그러한
공통된 규칙과 체계 속에서 그 기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규칙과 체계도 완전한 것이거나 불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어(기호)가
뜻하는 바가 세월에 따라서 변화하거나,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다른 뜻을 갖는 것에서 볼 수 있는 바이다. 결국 사람들의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즉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제로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한편으로 하나의 기호가 지시하는 정보의 개념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할 수는 없다. ‘빨갛다’는 단어에 대해 사람들마다 떠올리는 붉기의 정도도, 연상되는 의미도 제각기 다르다. 또한 ‘권리’나 ‘의무’와 같은
단어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기호는 단하나의 개념으로 규정될 수 없는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통에는
충돌과 오해가 생기기 마련이고, 한편으로는 한가지로 결정될 수 없는 해독의 즐거움이 생겨나는 것이리라.
미술에서는 기존의 약속이나
체계를 고의로 무시하거나 왜곡함으로써 기호에 또 다른 의미가 생겨나는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미술작품을 이루는 이미지를 비롯한
형식요소들은 그래서 단일한 해석에 국한되지 않는 더욱 더 큰 해석의 다양성이 존재하고, 그만큼 우리의 상상력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미술은 즐거운 상상력의 유희이며 정보를 보내는 사람에 국한하지 않고 받는 사람도 함께 하는 창조의 장으로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네 사람의 작가와 작품을 통해 이러한 즐거움의 일면을 발견하고자 한다. 개별적으로는 보다 많은 이야기 거리와 특성을 지니고 있는 네
작가는 각기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나 문화적 상징을 담은 이미지 등의 기호를 작품의 출발점으로 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네
사람의 작가에 대한 글 가운데는 단지 그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부분도 존재한다. 그래도 기호가 작가에 의해 어떻게 새로운 맥락에 놓여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에 대한 제시는 작가마다 다르다. 관습, 전통, 권위, 우상, 편견, 교조, 맹목, 그밖에 사태의 진상을 흐리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자신의 방식으로 시비를 걸고 들춰내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고산금은 공들여 만든 패널에 아크릴물감을
여러 차례 꼼꼼히 바르고 마감한 위에 모조진주를 어떤 규칙에 따른 듯이 붙여 놓았다. 그 규칙은 다름 아닌 잡지나 신문 기사거나 노래가사거나
시이다. 그야말로 주옥같은 시이거나 가사이거나 글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여성의 망사 옷을 연상시키는 구멍을 만들어 놓은
직물이 있다. 여기 구멍들 또한 패널의 모조진주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나는 양이요, 다른 하나는 음인 셈이다.
글자로 된 문서는 사람이
해독할 수 있는 기호를 이용하여 정보를 담아 놓은 매체이다. 그러므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기호를 해독하여 정보를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산금에게서는 정보를 구할 수는 없다. 다만, 제목을 보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면 시구나 가사를 기억해내어 진주나 구멍의 배열에 맞추어
흥얼거리거나 확인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신문에서 봤는데, 책에서 봤는데, 혹은 TV에서 그러는데 … 라더라.”라는
말을 흔히 한다. 그들이 진실(에 가까운 것)을 말하리라는 믿음과 함께 언제부터인가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한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사를 쓴 사람도 글을 쓰기 위한 정보들을 자신 나름의 맥락에서 수집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데도 철저히 객관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한 사건에 대해 신문마다 필자마다 논조가 다르고 비판과 긍정이 다른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결국 어떤 글도 완벽히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같은 글도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것이 아닌가.
고산금은 기호에서 정보를 제거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의미한
형상이고 그러한 형상의 일정한 배치가 된다. 그것은 이제 자의적이어서 모호하고 불확실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의 순수한 시각상이거나 혹은 새로운
기호로서 우리가 그것을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된 것이다. 백남준에 대한 추모 기사에 내가 가진 정보를 삽입할 수도 있고, 단지 모조진주의
배열을 눈으로 읽는 유희를 즐길 수도 있다. 익히 알고 있는 노래가사나 시라면 이미 딜리트(delete)되어버린 디스켓을 복원하듯이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정보로 껍데기만 남은 기호의 흔적 위에 복원해내는 절묘한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원래 기호의 소여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동유의 작품은 여러 개의 작은 이미지들이 모여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과일〉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접시에 사과로 보이는 과일을 가지런히 담아놓은 그림이다. 하지만 단일색조의 화면에서는 통상적으로 과일을 그려
놓은 정물화처럼 뚜렷하게 과일임을 인식하기 어렵고, 무언가 흐릿한 얼룩들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는 정도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체를 이루는 작은 이미지들은 지금도 여전히 뭇 남성들의 우상으로 남아있는 마릴린 먼로임을 알아낼 수 있다. 수많은 마릴린 먼로의
얼굴들이 각기 망점의 역할을 하여 과일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먼로를 확인하는 순간 그것들은 과일 무더기가 되어 있고, 과일을
보는 순간 먼로의 수많은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먼로의 얼굴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과일그림이라고 해야 할까(실제로
작가는 수없는 먼로 얼굴을 그렸을망정 과일은 하나도 그리지 않았다). 먼로를 보았다고 해야 할까, 과일을 보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둘 다 본
것일까?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무엇을 확인하거나, 적어도 무엇을 읽어내려 한다. 한참을 그림에 매달린 끝에 그럴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나 그림의 진상과 관련이 있다고 스스로 믿기에는 이제 망설임이 생기게 된다. 오히려 과연 ‘본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보아서 알아챈(인식한) 것은 진실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하는 문제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나의 시각에 대한 의심은
사람마다 보고 확인한 것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는 의심으로 일반화된다. 반대로, 보는 사람의 감정이나 신념, 혹은 경험, 생활방식에 따라서
동일한 기호가 제각기 다른 파장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말도 ‘아’다르고 ‘어’ 다르다고 했다.
마릴린 먼로는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우상인 동시에 수프깡통과 함께 팝아트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얼굴은 대중문화와 앤디 워홀을 연상하게 된다. 또한
과일그림은 현대미술의 아버지 세잔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가벼움과 무거움을 대비시켜 그들이 쉽사리 서로를 넘나들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고 본다. 위대한 세잔의 정물화와 한 때를 풍미한 여배우이자 미국 팝아트의 상징인 마릴린 먼로의 얼굴은 지금 나에게는 당시의
맥락과는 무관하게 새로운 의미를 가진 기호일 수도 있고 반대로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성민은 인터넷을 통해
비트맵이미지를 다운받아 특정 부분만을 선택하거나 확대, 혹은 가공하여 출력한 다음, 그 출력물 위에 종이를 놓고 모사해낸다. 애초에는 확인이
가능한 무엇이 담겨 있었을 이미지는 조작에 의해 불명료해지거나 아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점들의 집합으로 변형된다.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렸을
때의 이미지는 분명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는 하나의 완결된 텍스트였지만, 그의 손을 떠난 순간부터 그것은 새로운 맥락으로의 전이와 재구성이라는
운명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무작위적으로 포착한 이미지를 다시 무작위적으로 가공하여 원본과는 전혀 다른 무엇을 제시한다. 그야말로 맥락과
상황이 동일한 대상에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신문지에 찍힌 영화배우 사진에 십자반창고나 안경, 흉터, 수염
같은 것을 그려 넣고 키득대는 우리의 놀이와 마찬가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실제로 그는 인물사진에 머리카락이나 그밖에 것을 덧그려 원본
사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작가는 대상을 선택하고 가공하여 새로운 상황에 던져 놓음으로써 원본을 전혀 다른 무엇이
되도록 하는 역할을 할 뿐인 사람이다. 하나의 완결체였던 원본은 자기를 버림으로써 정체(죽음)를 벗어나 또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 가능태가
되는 것이다.
엄기홍은 자신의 논문 가운데 일부를 출력하여 여러 겹 포갠 포맥스 판에 대고 글자에 맞춰 드릴로 구멍을 낸다. 앞서도
말했듯이 문서는 문자라는 기호를 사용하여 정보를 담아 놓은 매체이다. 글이란 글쓴이의 손에 의해 완결되어, 그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읽혀서
분석되거나 비평되거나 해석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그러한 점에서는 미술작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가가 자기 글의 내용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자신의 글 일부를 선택하여 그 문자(기호)들을 일정한 질서를 가진 구멍으로 전환함으로써 논문 속에서
놓여있던 맥락에서 일탈시키는 것이다. 그 문자들은 저자로서의 주장이나 견해(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정보를 전달하는
기호로서의 문자가 아니다. 단지 원래 자신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늠케 하는 거푸집이나 주형, 혹은 허물 같은 껍데기일 뿐이며, 원래의 역할에
대한 경의이자 조사(弔辭)이다. 이렇게 작가는 스스로 자신의 논문을 조형화라는 방법을 통해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자신의 연구과정을 통해 성립된 조형적 논리가 실제로 구체화되는 동충하초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우리는 미술가의 관념이
어떻게 작품으로 구체화되는가 하는 하나의 예를 마치 도해로 이해하듯 보게 되는 것이다.
박정구(갤러리이안 큐레이터)
[ 고 산 금 ]
월간미술(백남주 추모기사) Monthly Art Magazine (A Memorial Article on Nam-June Paik), 2006, 패널에 아크릴.4mm 모조진주.접착제 acrylic on panel.4mm artificia, 55x45cm
윤동주 - 서시, 2006, 면사.코바늘 뜨기, 18x12cm
[ 김 동 유 ]
촛불 Candlelight, 2004,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62.2x130.3cm
과일 Fruits, 2005,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50호 변형
[ 문 성 민 ]
무제 S02001 Untitled S02001, 2002, 패널에 아크릴 acrylic on panel, 48x53cm
무제 A02004 Untitled A02004, 2002, 패널에 아크릴 acrylic on panel, 50x60cm
[ 엄 기 홍 ]
존재론적 기념비 Mounmentality of Epistemology, 2006, 포맥스에 드릴링 drilling on formax, 90x60cm(20pcs)
존재론적 기념비(세부 detail), 2006, 포맥스에 드릴링 drilling on formax, 90x60cm(20p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