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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볕, 의미의 재순환

 

르네 마그리트처럼, 미셸 푸코처럼 설명하자면, 이 꽃은 꽃이 아니다. 누구라도 보면 다 알 수 있는 이 말에서 장준석의 미술은 출발한다. 리프리젠테이션 representation 이라는 영어 단어를 우리말로 바꿀 때,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들은 예술학의 개념으로 표현이라는 단어보다 재현이라는 용어로 많이 써왔다. 재현은 대상을 '여기 이곳에 다시' 드러낸다는 현상학의 철학적 의미가 짙다. 그런데 최근 현대 미술을 살펴보면, 재현보다 표현이란 말로 다시 돌아가는 게 좋은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어떤 것은 재현도 표현도 아니고, 그냥 표시일 수도 있다. ● 이제 과거형으로 써야 되겠다. 장준석은 리프리젠테이션에 관한 재미있는 일을 벌였다. 꽃, 작가는 두 개의 자음과 한 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이 글자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갔다. 꽃 이미지가 아닌 꽃 글자로 자신의 미적 세계의 질서를 바라보고자 하는 작가에 대하여, 미술평론가들은 비평이라는 2차적 질서의 관찰을 뒤따라 했다. 그것은 평론가들에게 꽤나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지금 나는 장준석을 비평하는 게 아니라, 장준석 비평을 비평한다). 텍스트로 보자면 한 없이 빈약하고 단순한 꽃 한 글자를 수많은 음운과 단어와 문장과 맥락으로 구성한 글로 기다랗게 대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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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들이 글을 매끄럽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기호학이란 말을 넣어야 그럴 듯 해 뵌다. 그런데 이 작업은 소쉬르나 야콥슨의 기호학으로 해석하기에는 사회성이 빈약하고, 에코의 기호학을 인용하기에도 역사성이 배제된 터라 힘들다. 내 생각에는 차라리 단순하게 현상학적인 입장에 선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기호학을 끌어들이는 편이 나을 듯하지만, 인문사회과학자들의 날선 반응이 성가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평론가들은 장준석의 예술 기호론을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아 생기는 틈에서 아름다움이 비집고 나온다는 식의 해석을 내어 놓는다. 이는 해석이지 분석이 아니다. 차라리 우리의 단순한 반응이 더 정확하다. 장준석의 '꽃'을 보면 '헉'이라는 반응이 그것이다. 참으로 장준석의 꽃 연작은 '장난 아니게' 덩그렇다. ● 우리가 접하는 자연 속의 꽃들은 그자체가 각각 하나의 사물인 동시에 현상이다. 예컨대 코피는 사람의 콧속 핏줄이 터져 나온 피인 동시에, 허약해진 몸 상태의 신호 혹은 싸움에서 두들겨 맞은 패배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꽃은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꽃들은 필연적으로 피게 마련이고(우연히 개화를 거르는 때도 있지만), 그 모양새와 얼개의 차이도 거의 없다. 그런데 장준석의 꽃은 우연성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무자비하리만큼 필연적인 이 꽃들은 미리 계획되었으며, 공학으로 고려되었으며, 엄밀하게 표준화된 물건이다.
 
예술 창작에서 구상과 실행은 엄격하게 구분할 수 없는 과정이지만, 장준석의 제작 실행 단계는 착안 구상과 확실히 선을 긋는다. 여기에는 수치로 환원 가능한 계산가능성, 창작에 필요한 요소들을 적절하게 분배할 수 있는 효율성, 그리고 작품을 오차 없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일관성이 작업을 지배한다. 이처럼 엄격한 원칙 아래에서 탄생하는 꽃은 결정적으로 꽃의 형상을 띠고 있지 않다. 꽃이 가진 물성도 없다. 정사각형의 입방체로 된 덩어리는 한글로 꽃이라는 글자이며, 쇳덩어리나 합성수지이다. ● 특별히, 작가는 볕을 추가한다. 그의 새로운 시도이다. '햇볕', '봄볕', '땡볕'이라는 말에 따라붙는 명사로서 볕은 인공적인 LED광선으로 대체되어 전시 공간에 재현되거나, 표현되거나, 표시된다. 작가는 꽃이든 볕이든 실제적인 사물 또는 현상을 배제한다. 단, 몇몇 자연적 환경은 의도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바닥에 깔린 잔디나 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그렇다. 인공적이거나 자연적인 환경의 범주가 우리의 생활세계 안으로 들어올 때, 그것을 경관(landscape)이라고 부른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주제에 그러한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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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에서 파생된 단어, 랜드스케이프는 매우 스케일이 큰 시각적 인지를 요구한다. 경관 속에서 총체적인 이미지는 그 속에 포함된 개별적인 사물이나 현상의 호출에 무심하다. 가령 도시 경관 속에서 줄 이은 자동차들의 전조등 불빛은 그 존재의 효용가치와 무관하게 때로는 끔찍하게, 때로는 아름답게 전체 이미지를 구성한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구성된 낱개의 이미지들은 단촐한 표시로서 특정한 속성을 품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당구장의 표시, 교회의 표시, 목욕탕의 표시가 있다. 담벼락에 그려진 무시무시한 표시도 있다. 약국의 '약'표시, 책방의 '책'표시처럼 꽃집의 '꽃'표시도 있다. 어린 시절 작가는 도시 경관의 여러 기호들 가운데 '꽃'에 주목했다고 한다. ● 꽃에서 느낀 작가의 체험이 특별한 사적인 체험일 수는 없다. 꽃은 일상생활 속에 흔히 노출된 기호이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가 꽃이 가진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꽃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다른 지향점을 가진다. 꽃처럼 상징화된 의미가 관습적으로 굳어진 대상, 그것에 대한 의문이 존재할 여지가 작은 커뮤니케이션 체계에 작가는 저항한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한편으로는 꽃은 아름답다는 기존 체계에 슬쩍 올라타기도 한다. 작가로서의 당연한 정신적 권리이다. ■ 윤규홍

<이미지, 글 출처 : 네오룩 www.neol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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