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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대, 민균홍, 복정순, 유재중
시작기간 2008-05-30
종료기간 200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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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를 빚다. 그리고 그 쇠를 통해 느끼다.

1. ‘빚다’라는 동사를 사전에서 찾으면, “흙 따위의 재료를 이겨서 어떤 형태를 만들다.”라고 되어있다. 그러므로 조각에서 ‘빚다’라는 말은 ‘소조(塑造)’에 어울린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전시 이름을 ‘쇠를 빚다’라고 한 것은 쇠라는 재료를 흙이나 돌을 대하듯 다룬 작업에 초점을 두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단단한 쇠를 자르고 두드리고 녹이는 등의 행위를 통하여 만든 조각전이다. 그런 연유로 전시에서 ‘빚다’라는 단어에 보다 합당한 과정을 거친 鑄造작업은 배제되었다. 흙과 같은 부드러운 재료를 빚는 것에서 연유한 금속조각과는 다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다른 분야에 비해 조각은 더 큰 노동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지만, 단단한 쇠를 ‘빚는’ 일은 더더욱 그러하다고 할 것이다. 물론, 작업에 더해지는 노동의 양이 작품을 가늠하는 미덕의 전부일 수는 없다. 또한 쇠를 ‘빚는다’라는 관점에서만 공통점을 가질 뿐, 참여한 작가들의 작업에서 노동이란 것은 그들이 지향하는 조형의 불가결한 수단의 하나로서 선택일 뿐 목적도 전부인 것도 물론 아니다.
오늘날, 시중(市中)은 더더욱 ‘가열차게’ 물신화를 찬미하여, 종내는 차마 마냥 드러내 놓지는 못하던 그것을 ‘당당함’이라는 이름으로 일상화하는 공동정범이 되자고 부추긴다. 그래서 가슴 한 구석에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져 쳐박힌 수오지심(羞惡之心) 마저도 비아냥 거리로 만들고자 한다. 편승한 미술 일각은 가치를 뒤집어서라도 이욕(利慾)을 좆아 질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 그 대안(對岸)의 가능성과 여지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은, 거창한 도덕주의가 아닌 일방적 과잉이 불러오는 물림증이며 자연의 길항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몰개념한 선정적 작업들을 피해 미술작품이 주는 제각각의 위안을 받을 기회는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작업들 가운데 조각으로, 또한 쇠를 빚는 작업으로 범위를 좁혀 이야기를 하고자 할 따름이다. 참여 작가들의 작업은 노동의 집적이라는 점에서보다, 기본적으로 긴 시간 대상과 마주하는 성찰과 체험으로서의 미학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논의의 귀결도 작가들이 각기 지향하고 있는 조형적 의미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김영대 - 재현의 두 전통, 그리고 회화를 담는 조각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그리듯이 만든다고 말한다. 물체를 석고로 떠낸 틀 안에 가는 구리막대를 대고 용접기로 녹여 선을 긋듯이 형태를 만들어가는 작업방식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그려 만든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오랜 시간 이러한 ‘그려 만들어지는 조각’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금속을 용접하여 대상을 재현해내는 방식이 가지는 가능성과 가치에 대한 신념 때문이라 할 것이다.(중략)
구리막대를 녹여 그가 빚어내는 과일이나 생선, 꽃, 그리고 화병이나 화장품 병들은 연필이나 붓으로 드로잉하듯 일정한 패턴과 질서를 가진 선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리막대가 불에 녹았다가 식는 과정에서 얻어진 우연한 색의 변화는 물감이 만들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색채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원본이 가진 색채가 주는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절묘한 색채의 유희이다.(중략)
이러한 작업은 그 방식만으로도 조각전시를 보리라고 기대하는 이에게 매우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온다. 우리를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액자 속 바탕의 일부, 혹은 전부가 반짝이는 스테인리스여서 올리거나 띄워 놓은 물체들을 거울처럼 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눈은 그의 작품에서 그려 만든 액자, 실물 그대로 그려 만든 입체 주조품(鑄造品), 그리고 그 주조품이 바탕에 비친 이미지(일루젼)을 함께 보게 되기 때문이다. 회화와 조각을 한꺼번에 감상하는 모양이 되는 것이다.
제작방식과 그 결과의 양면에서 회화의 원리에 따른 작가의 작업은 이제는 ‘그림’과 ‘조각’을 하나의 문제로 뭉뚱그려 생각하는 데에 이르도록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의 ‘그리기’는 그림(회화)이 아닌 조각이라는 형식을 가지지만, 회화의 그리기와 근원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회화의 영역으로 융합하고 있음을 보다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작업은 재현, 공간, 평면, 입체와 같은 문제와 그들 간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회화와 조각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회화와 조각에는 모두 대상을 재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하나는 평면으로, 다른 하나는 입체로 제시한다는 차이를 가진다. 한편으로 조각은 원본과 동일한 3차원의 형태를 가짐은 물론 촉각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보다 직접적인 재현방식을 취한다. 그렇지만 원본이 아닌 재현이라는 점에서는 회화나 조각은 마찬가지라고 할 것이다. 그의 작업은 조각과 회화의 이러한 오랜 구별과 차이에 구애됨 없이 대상의 재현이라는 공통의 숙명을 하나의 것으로 이해하고 해결하고자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액자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몹시 완고한 것이어서 그 안팎의 공간/면을 여지없이 단절시킨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는 재현된 조각과 그것이 놓인 공간, 그리고 빛과 그림자라는 조각의 전통적인 개념과 터전은 제한받는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반대로 이차원의 환영공간이라는 회화의 본질을 명시하기 위해서는 액자만큼 효과적인 수단을 찾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조각과 회화의 오랜 관계를 효과적으로 함축하여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회화는 한편으로 공간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의 조각은 회화의 미덕을 담는다. 조각이나 회화는 원론적이고 메마른 개념 규정이기 이전에 조형을 실행하는 인간 행위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그의 이러한 작업은 회화와 조각이 서로 경계를 녹여 통섭하기를 거듭해온 현재의 양상에서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방식이 될 것이다.(2008년 개인전 도록에서, 필자의 글 발췌)

3. 민균홍-화려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공간의 창조
그의 작업실을 찾는 일은 몹시 흥분된다.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혼자 운전하는 즐거움과, 그 길에 만나는 유별나게 짙은 녹색을 띤 골짜기의 저수지들과, 그리고 철따라 눈에 들어오는 산야가 있고, 면소재지 개울가에 맛깔스런 막걸리집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알 듯 모를 듯한 이런 흥분은 그의 작업을 마주한 이후인 두 번째 방문부터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의 작업은 회화와 더불어 조각이 어째서 우리에게 매력적이고 의미 있는 조형수단인가를 다시금 떠올리고 생각하게 한다. 그의 작업은 무엇을 재현하지는 않는다. 다만 비어있던 공간에 놓인 점·선·면들이 그들이 점하고 있는 공간과 주변 공간을 어떻게 미적으로 의미 있게 만들어줄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하며, 또한 그러한 배치가 우리를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에게는 몹시 힘든 인내와 시간을 요구했을 작품이, 보는 이에게는 공간의 유희요 점과 선과 면들의 하모니이자 바리에이션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개방된 옥외이든 혹은 일정하게 규정된 실내이든 빈 공간에 하나의 입체 조형물이 놓임으로서 그 공간은 새로운 의미와 생명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깨달음과 그로 인한 즐거움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물을 재현한 크고 작은 조각들이 주는 즐거움과는 다른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철과 알루미늄을 자르고 굽히고 두드리고 용접한다. 그들은 때로는 유연한 선조(線條) 위주의 구성을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작은 조각들로 결합된 입체와 면의 구성을 보이기도 한다. 채색된 알루미늄 조각들은 서로 결합된 각도에 따라 빛을 받아 색채의 미묘한 변화로 반짝이며, 검붉게 녹슨 철판조각들은 오히려 우리의 눈을 편안하고 안정감 있게 만들어준다. 절단기로 잘라 용접한 금속편들의 조합인 경우라 하더라도, 날카롭고 차가운 금속의 인상보다는 오히려 부드럽고 원만하며, 공간을 가르고 나누고 있다기보다는 그 공간에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억세고 단단한 쇠를 재료로 사용하면서도 부드럽고 편안한 작업을 이끌어 내는 것은, 공교함을 좋아하지 않는 순한 성품 때문일 것이다.
순수한 공간에 순수한 형태들이 그렇게 놓인 것이 자연이라면, 그 공간에 자연을 본떠 의미 있는 형태를 만드는 것이 인간의 조형일 것이다. 인간이 만든 조형이 순수한 형태와 공명하여 떨림을 만드는 그 순간이 바로 그런 조용한 흥분의 순간이 아닐까 한다. 그 떨리는 흥분의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기에 가능한 축복일 것이다. 그것이 작가이든, 우리 같은 평범한 관객이든.

4. 복종순-견고한 틀을 향한 저항과 도전
그가 금속제 기물을 두드리는 작업을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반으로 10년 넘게 지속되어온 방식이다. 일상의 여러 금속제 그릇과 기구들을 망치로 무수히 두드려 편 그의 작업은 대체로 원형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두드려 얇게 펴지고 헤진 그릇은 빈껍데기나 허물처럼 원래 모습의 ‘흔적’만을 가지게 된다. 쓸모의 상실이며 세상에 존재했던 가치의 축출이다. 사물은 그에 의해 기성의 기능, 혹은 존재가치를 박탈당함으로써 새로운 ‘존재의미(의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레디메이드는 개념의 전치를 통해 기성품을 예술로 끌어들였다. 복종순의 작업에서도 기성품을 탈기능화하는 과정이 수반된다. 그런데, 레디메이드가 ‘기성품의 제시’를 통해 미술개념을 전복하고자 했다면, 복종순의 작업은 ‘효용(또는 기능)이 제거된 기성품의 제시’를 통해 기성미술에 대립한다. 십년 넘게 그가 해온 두드리기(때리기)는 기성미술과 그 견고한 틀에 대한 그의 저항행위였기에, 그가 부여한 새로운 존재의미(의 가능성)를 기성의 미술영역 그 어디쯤에 있는 것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 않다. 기성 미술의 영역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그의 작업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라는 오해는 벌이지 않았으면 한다. 이리저리 산자락을 옮겨가면서 계속해온 그의 두드리는 행위와 작업은, 그가 ‘작가로서 자신과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계속해온 질문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복종순에게 그것이 존재해야할 세계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예술의 세계라기보다는 기성예술 그 언저리의 또 다른 어디쯤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집요한 두드림으로 형해처럼 만들어버린 그것에서 예술의 공허함과 허무를 느끼는 것이 아마도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은 아닐까…

5. 유재중-고전적 노동이 빚어낸 은은한 장식성
유재중 또한 90년대 이래 철을 재료로 작업해 왔다. 그의 자료에서 작업 도중에 벽에 붙여둔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모티브를 얻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그가 모티브를 얻었을 것으로 보이는 삼족오 이외에도 제륜신(製輪神)과 더불어 야철신(冶鐵神)이 등장한다. 바퀴와 철이 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고대국가 형성에 밑거름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한 먼 옛날과 다름없이 화덕과 모루와 망치를 도구로 쇠를 다루는 일은 오늘날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반면에 인간은 여전히 똑같은 도구로 똑같은 작업을 하고 있다. 거두절미하면, 바로 그것이 유재중의 작업을 의미 있게 하는 출발점이리라는 것이다.
예술이, 미술이 세계와 그 원리에 대한 직관과 성찰을 바탕으로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첨단 도구들이 생겨나고 그 어느 때보다도 넓고 깊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오늘날은 미술의 그러한 성격을 더욱 강화시켜주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 없이 몸만을 혹사한 것을 높이 사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그럴수록 교묘하고 얄팍한 꾀와 속임수로 사람들의 눈과 판단을 기망할 여지는 넓어지게 된다. 유재중의 작업은 우선 성실한 몸씀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이 그가 철을 선택한 이유이다. 성실한 노동에는 얄팍한 꾀가 개입되기 어렵다. 그의 작업은 그러한 신뢰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는 철봉과 철판을 자르고 두드려 형태를 만든다. 때로는 ‘유려한’ 선들로 얽힌 ‘근육질’의 공간을, 때로는 아라베스크나 인동당초문을 보는 듯한 생각을 들게 하는 평면을 만들기 위해 철을 두드린다. 쇠를 두드리는 무념의 시간을 통해 빚어낸 그의 작업에서 우리는 그 오래전 쇠를 두드리던 대장장이를 만나고 칼 빚고 흙을 빚던 장인들을 마주한다.
쇠가 둔중하고 거친 재료라고는 하지만, 다루는 손길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응하는 것 또한 쇠라는 재료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쇠는 예민한 그의 습성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손을 떠난 쇠는 거칠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그 어디에나 그의 손길과 만짐이 뚜렷하다. 섬세하되 두드러지지 않는, 그렇지만 어디 한 군데 그의 염려가 닿지 않은 곳 없는 은은한 생명력과 존재감이 쇠의 차가움을 잊게 하는 그의 작업이다.

6. 90년대 후반 이후 특히 조각에서는 ‘조각하기’보다는 ‘만들기’가 크게 늘어났었다. 미디어아트의 유행과 더불어 조각의 가능성 확장이라는 의미에서 ‘만들기’는 매우 참신한 작가와 작품을 선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기존 조각이 수용하기 쉽지 않았던 다양한 재료와 기법으로 조각에 관한 논의의 범주를 확장시켰다. 이러한 경향은 회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회화 역시 ‘그리기’보다는 ‘만들기’, 즉 다양한 방식으로 화면을 구성해내는 성과에 주목하는 작업들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미술과 그 논의를 다변화하고 확장하는 의미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 상당수는 결국 단지 ‘꾸밈’으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현재 유행하는, 소위 잘나가는 경향의 상당 부분도 이러한 표피적 성과에 환호하는 시장수요에 부응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 경우는 ‘만들기’의 과잉으로 껍데기의 과잉을 초래하였고, 결과적으로 그 과잉들은 ‘그리기’와 ‘조각하기’와 같은 자기존재의 근원조차 폄훼하는데 이르렀다고 여겨지는 많은 징후들을 낳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입체든 평면이든 이러한 작업에서 그 표피를 뚫고 핵심 깊숙하게 관통하는 직관과 성찰은 찾기 어렵다. 다만 시류를 등에 업은 변죽 울리기의 진화가 그것을 대신하고 있음은 무수히 확인할 수 있지만…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미술가라기보다는 프로듀서 PD 를 더 많이 마주하게 된 건 아닌지 모른다. 요즘 아이들이 환호해 마지않는 TV 프로그램과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박정구(갤러리이안 큐레이터)

 

 

[ 김 영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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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풍경, 2007, 동 용접, 90x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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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정물, 2008, 동 용접, 97x117cm

 

[ 민 균 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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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08, 철용접, 170x92x1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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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07, 철용접, 100x91x3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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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07, 철용접, 75x75x35cm

 

[ 복 종 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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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07, 도금한 철, 가변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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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07, 도금한 철, 가변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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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07, 도금한 철, 가변설치

 

[ 유 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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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08, Iron Drawing, 140x70x8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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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08, Iron Drawing, 120x1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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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08, Iron Drawing, 77x42x5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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